서평단 트레바리 <다산어록청상> 서평

  감히 내가 이 책의 내용에 나만의 방식으로 정리할 수 있을까? 조선 최고의 천재라고 불리우는 정약용의 글들을 열 가지의 주제로 정리해서 가장 교훈적인 말들을 뽑아 모았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한 페이지 한 페이지에 적혀 있는 말들이 모두 주옥과 같았다. 이 글들을 정리할 수 있을까?

   K-POP STAR에서 박진영 심사위원이 항상 오디션 보는 지원자들에게 하는 말이 있다. 어깨에 힘을 빼라. 그리고 그냥 툭 던지듯이 노래를 불러라. 정약용도 똑같은 말을 했다. 어깨에 힘을 빼라. 그리고 말을 하고 글을 적어라. 모든 것이 똑같은 것 같다. 어깨에 힘을 빼라. 지나가는 소리로 들은 이야기로 골프 역시 어깨에 힘 빼는데 3년이라고 한다. 이 말이 뜻하는 바는 무엇일까? 기본적으로 어떠한 경지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3년은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어깨(몸)에 힘을 뺄 수 있는 경지 말이다.

 

   그리고 그러한 경지에 도달하기 위한 지름길로서(누가 공부에 왕도가 없다고 했는가!!!!!) 정약용은 필사와 체계화를 이야기한다. 의외였다. 필사는 당연했지만 체계적이라니. 나는 정약용은 그러한 체계화적인 독서가 아닌 엄청난 다독으로 인한 연결고리가 생긴 것으로 생각했었다. 하지만 정약용은 아주 체계적인 공부방법을 썼다. 차례를 먼저 보고 주제별로 나눈다. 그리고 읽는 책의 내용을 그것에 맞춰서 필사하면서 읽는다. 현대에 카드공부법이라고 불리는 것을 이미 썼던 것이다. 나로 하여금 가장 반성하게 하는 내용이었다. 그동안 책을 읽을 때 무작정 좋은 글귀라고 생각하고 적는 것이 다였다. 그래서 분명히 남는 것은 있어서 두리뭉실하게 남았었다. 그러니 생활을 하다가 가끔 떠오르는 경우는 생겨도 몸과 머리에는 제대로 남지 않았던 것이다. 항상 주변 사람들이 이야기 하던 것!!! 큰 그림은 잘 그리는데 디테일이 부족하다. 그것의 이유가 바로 체계화시키지 않았던 것이다. 그동안 겉멋으로 나는 제대로 하고 있다는 착각이 깨진 것에 너무 감사한다.

   그러면 독서를 통해, 경험을 통해 익히는 것은 어떻게 하는가? [리딩으로 리드하라]의 저자 이지성 작가님도 강조하듯이 필요한 것은 Reality다. 정약용조차 현실에 쓸모가 없는 학문은 쓸모없는 학문이라고 말한다. 처자식이 굶어 죽는데 자기는 방 안에 쳐박혀 체면을 차리면서 책 만 읽는 것만큼 부끄러워해야 하는 것은 없다고 했다. 혼자만의 세계에서 깨달음을 얻었다고 오만해 지는 것만큼 바보 같은 짓은 없다고 했다. 여기서 한국의 공부방법에 대한 의문점이 든다. 토론이 없다. 혼자서 책상 앞에 앉아서 공부한다. 자신만의 세계에서 벗어나기가 힘들다. 선생과의 질문 응답보다는 수동적으로 받아드린다. 이것이 좋은 공부 방법이라고 할 수 있을까? 정말 공부라는 것은 자신의 방에 박혀서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거실에서 가족들과 함께, 친구들과 토론을 하면서, 선생님께 질의응답을 하면서 해야하는 것이 아닐까? 잠시 딴 곳으로 빠졌지만 우리가 인문학을 공부하는 것도 현실을 바꿔보기 위해서이지 않는가? 조선시대 양반처럼 이것 아니면 안된다는 교조화 된, 자신의 배가 채우고 지키기 위한 인문학이 아닌 세상을, 그리고 자신을 조금 더 좋게 만들기 위한 인문학이지 않는가? 그러니 세상과 교류를 하자. 자신의 깨달음과 경험을 아낌없이 나누고 다른 사람의 것을 받아드리자. 그러면 나도 좋고 세상도 좋은 것이지 않을까?

 

 

   그리고 이렇게 학문을 익힌 후에는 어떻게 해야 할까? 자신을 낮춰서 배우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다른 사람의 단점을 감싸줄 수 있는 아량이다. 익힌 것이 많다고 그것을 이용해 다른 사람의 단점을 들춰내는 것은 소인배가 하는 짓이다.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을 생각해보자. 글을 적을 때 간절함이 담겨 있어야만 한다. 그러나 이 책을 읽으면서 깨달음을 표현하기에는 나의 글솜씨가 부족함을 느낀다. 우리가 책을 읽고, 세상에 대해서 알아가는 이유가 뜻을 세우고 그 뜻을 이루기 위해서이지 않을까? 가슴에 품은 뜻을 펼치기 위해서, 멋진 인생을 살기 위해서 공부하자.

                                                                                                                     글 / 산업시스템공학과 4학년 류동균

 

     <행복과 정의의 조건 - 표창원 前 교수>

 

 

    매스컴이나 주위 사람들의 말을 통해 접했던 표창원 교수는 냉철한 이미지였지만, 이번 특강을 통해 그로부터 보다 따뜻하고 친근한 느낌을 받았다. 이번 강의의 주제는 그의 전문 분야와 관련 있는 학술적 주제가 아니라, 그보다 가벼워 보이지만 어쩌면 훨씬 무거운 주제일지도 모르는 행복과 정의에 대한 것이었다. 행복을 이야기할 때는 부드러웠으며, 정의를 이야기할 때는 단호했다.

 

  행복의 우선조건은 무엇일까, 제 1조건으로는 위험으로부터의 안전이 있다. Maslow의 5단계 욕구중 최우선 욕구인 생존의 바로 다음의 단계가 바로 안전이다. 모든 사람들은 늘 안전에 대한 불안감과 걱정을 지닌 채 살아간다. 현재 우리나라 상황을 보기만 해도, 북한의 위협이 매우 큰 부담감으로 다가오고 있다. 이런 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각 분야의 전문성이 있어야 한다. 즉, 안전을 지킬 수 있는 방법을 속속들이 아는 것을 통해 편안해질 수 있다. 막연함에 대한 불안감이 가장 크다고 하는 부분이 가장 공감되는 내용이었다. 예를 들어 이미 결과를 알고 있는 경우와 아무것도 모르는 경우에, 어느때가 더 불안감이 크겠는가?


  제 2조건은 사랑하는 사람과의 공고한 관계, 즉 신뢰이다. 이 부분 역시 어느 정도는 안전과 연관된 내용인 듯했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서 마음을 편히 쉴 수 있는 안식처가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돌아갈 수 있는 곳이 없다면 자신이 안전히 쉴 수 있는 곳이 없어진다고 생각했다.
최근 이슈로 떠오르게 해준 대선관련 정치적 발언에 대해서도 얘기하셨다. 모든 문제가 정의의 문제이다. 오죽하면 우리나라 국민의 75.8%가 우리나라는 정의롭지 못하다고 생각하고 있겠는가. 모든 사람들이 우리나라가 선진국이 되어야 한다고 이야기하는데, 이를 위한 가장 큰 과제가 바로 정의이다. 뉴스를 보면 매일매일 비리, 근무태만, 뇌물수수 등등의 얘기로 더럽혀져 있지 않은가. 언제나 부정부패를 척결하겠다고 하지만 그것을 뿌리 뽑기에는 아직 멀어 보인다. 우리는 이 문제를 정의롭게 처리해야 한다.



  그 외 부가적인 요소로는 성취감, 감수성, 정의, 비움, 자유 에 대해 말씀하셨다. 이중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아무래도 자유이지 않을까 한다. 자유란 무언가를 자기 마음껏 할 수 있다는 뜻일 텐데, 이는 자신이 어느 곳에 속박되어 있거나 억압되어 있다면 꿈꿀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설령 자유를 가진다고 해도 완전한 자유가 아니고 부분적인 자유가 되는 것이다. 부분적으로만 자유로운 이러한 상황에 얽매이고 적응해 버린다면, 행복에 대해서도 체념하게 된다. 그러한 상황을 탈피해서 자신이 생각하는 정의와 성취감을 얻기 위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지위에 대한 욕구를 비우고 자유를 찾게 된다면, 비로소 행복해질 수 있다. 이미 위에서 이야기 했지만, 불안함은 언제나 막연함에서 온다. 무엇이든 넘어선다면, 별 것 아니다. 당신을 잡아먹지 않는다.

   “18대 대선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지만, 경찰대 교수라는 직책이 가진 이미지 때문에 자신의 의도와는 다른 뜻으로 비춰질까봐, 사직서를 냈습니다.”
철밥통이라고 불리우는 교수직을 내팽개치고 자신이 가고자 하는 길을 가는 표창원 교수의 모습을 보고 지금 나의 모습은 어떤가 생각했다.
나는 행복한가? 나는 정의로운가? 결론을 말하자면 행복하다. 하지만 정의로움에 대한 대답은 쉽게 못 내리겠다. 계속 언급하지만, 불안함은 막연함에서 온다. 통계학을 버리고 광고학으로 전환하기 전에는 ‘지금 전공을 바꾸기에는 학번이 너무 높은 게 아닐까?  거기서도 제대로 못하면 어떡하지?’ 등등의 불안함이 있었지만, 그 불안을 과감히 뚫고 전공을 바꿔서 얻은 성취감은 나의 선택에 대한 확신을 불어넣어줬다. 덕분에 행복한 학교생활을 하고 있다. 하지만 정의로움에 대해서는 확실히 얘기를 할 수 없는 것이, 아직까지 정의에 대한 개념을 완전히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내가 과연 정의로운지는 풀어야 할 숙제이지만, 이 사색으로 내가 좀 더 발전되었으면 한다.
모두 무서워하지 말고 자신이 하고자 하는 뜻, 정의대로 길을 걷자. 행복은 따라 올 것이다.

                                                                                                                               글 / 통계학과 4학년 이원빈

이향의 계층대한 사모 혹은 반발

 

‘자기가 태어나고 자란 고장’, ‘조상 때부터 대대로 살아온 곳’이라는 정의에서 나아가, ‘고향’은 이를 떠난 이들에 의해 ‘상상된 공간’, ‘심상적인 공간’, ‘낙원으로서 이상화된 공간’으로 이해되어왔다. 그러나 이처럼 고향을 낙원과 같은 곳으로 바라보는 정도가 사람마다 모두 동일한 지에 대해 의문을 품은 일본의 한 시인인 이시카와 다쿠보쿠에 의해 ‘고향의 분열’이라는 개념이 뒤이어 등장하였다.

  다쿠보쿠에 의하면 고향은 그리운 고향’과 ‘나를 떠밀었던 고향으로 분리된다. 전자는 고향에 대한 사모를, 후자는 고향에 대한 반발을 낳는다. 특히 다쿠보쿠는 ‘나를 떠밀었던 곳’으로서의 고향을 더 깊게 각인하고 있는 이들에 주목한다. 이들은 ‘고향에 의해 박해당한 우리에게 고향이라는 관계성은 회복될 수 있는가’에 대해 고민한다. 보통 도시로 간 사람들은 ‘고향’이라는 추상화된 공간을 하나의 근거지로 삼고 이를 기반으로 현재의 공간을 상대화하며 정체성을 바로잡아나간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고향에 대한 반발을 품은 채 도시로 떠나온 사람들은 도시 안에서의 자신의 정체성을 세워나가는 데에 필요한 바탕이 흔들리게 된다. 

  고향에 대한 이와 같은 인식은 이와모토 요시아키에 와서 ‘이향의 계층성’으로 이어진다. 이는 쉽게 말해 고향에 대한 인식이 사람마다 단일하지 않다는, 즉 객관적이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마다 앞서 말한 ‘고향의 분열’의 정도, 즉 고향에 대한 사모 혹은 반발의 정도에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이향의 계층성’에 관한 논의는 최근 조선족의 이민 문제로까지 이어진다. 약 200만 명으로 추산되는 중국 조선족은 한반도에 살다가 19세기 중반에서 1945년까지 두만강, 압록강을 건너와 동북에 정착한 민족의 후예로서 오늘도 여전히 유대민족과 마찬가지로 디아스포라의 특성을 갖고 있다. 특히 1978년 개혁개방 이후 조선족의 한국·일본·러시아·미국 등 나라로의 이동 및 산해관 이남 대도시로의 이주는 새로운 디아스포라들을 양산하고 있다.

  이들 조선족들에게 있어 고향은 ‘자기가 태어나고 자란 고장’일 수는 있어도 ‘조상 때부터 대대로 살아온 곳’이라고는 할 수 없다. 또한 조선족들은 한편으로는 이주민(移住民)이라는 굴레와, 이로 인해 더욱 증폭된 가난으로 인해 애초에 ‘고향’이라는 공간이 원초적으로 부여하는 따스함을 정주민(定住民)에 비해 덜 받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즉 애초에 이주민이었던 이들이 1978년 이후 다시 이주의 과정을 거치면서 조선족의 고향 인식은 더욱 복잡해졌다. 

본 서평에서는 이 중에서도 ‘한국으로 떠나온 조선족들’에 주목해보고자 한다. 1970, 1980년대에 우리나라 사람들이 아메리칸 드림이라는 명목 하에 미국으로 떠난 것처럼, 조선족들도 자의 반 타의 반 돈을 벌기 위해 한국으로 떠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요시아키가 말한 ‘이향의 계층성’은 바로 이들에게도 적용된다. 연변을 떠나 한국으로 들어온 조선족 사이에서도 ‘그리운 곳’으로 고향을 인식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나를 떠밀었던 곳’으로 고향을 인식하는 사람이 있는 것이다.

2012년에 출간된 김사과의 <테러의 시>에는 이 중 후자의 모습이 보다 극단적으로 서술되어 있다. 소설 속 주인공의 인식은 ‘고향에 대한 반발’을 넘어 ‘고향에 대한 부정’으로까지 이어진다.

<테러의 시>의 주인공 제니는 사막화된 연변(으로 추정되는 곳)의 한 마을에서 서울 외곽의 불법 섹스 클럽으로 팔린 인물이다. 고향 마을에서 제니는 아버지에게 심한 폭력은 물론 매일 강간까지 당하는 나날을 보낸다. 그러던 중 제니의 아버지는 그녀를 서울의 섹스클럽에 팔아넘기고 돈을 챙긴다. 그리고 그녀가 차에 실어지자마자 그간 모래의 무게를 견디지 못 하던 집이 무너지고 그녀의 아버지는 이에 깔려죽는다. 제니가 차 안에서 이 장면을 바라보며 웃는 것으로 소설은 시작한다.

제니의 상상 속에서 도시는 언제나 모래에 파묻혀 있다.

문이 열리고 들어오는 남자는 대개 중국인이거나 조선족이다. 남자는 제니에게 조선족이냐고 묻는다. 난 그런 거 몰라요. 제니가 웃는다. 남자는 제니에게 중국말을 할 줄 아느냐고 묻는다. 난 그런 거 몰라요. 제니가 웃는다. (…중략…) 나는 중국에서 왔다. 너도 중국에서 왔니? 제니는 한 손에 남자의 페니스를 잡고 웃는다. 난 그런 거 몰라요.

    제니는 언제나 고향을 ‘모래 속에 파묻혀 있는 곳’으로서만 인식할 뿐 ‘그리운 곳’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중국인이거나 조선족인 섹스클럽의 손님이 동향(同鄕)이라는 데에서 그녀와 동류의식을 느끼려 할 때에도 제니는 “난 그런 거 몰라요.”라고 일관할 뿐이다. 제니에게 “너도 중국에서 왔니?”라는 말을 건네는 행위에는 고향이 같다는 것을 빌미로 연대하고자 하는, 위로받고자 하는 의식이 깃들어 있다. 따라서 이들은 섹스클럽을 찾을 때에도 (넓은 범위로) 자신과 같은 고향에서 온 여자를 골라 관계를 가지며 고향이 같은지를 계속해서 되묻는다.

  이처럼 같은 고향을 떠나 한국으로 왔을지라도 고향에 대해 어떻게 인식하는지는 개인마다 그 층차가 있다고 볼 수 있다. 인용문 속 남자에게 고향이란 도시에서도 안정감을 느낄 수 있게 해주는 보다 이상적인 공간인 것에 비해, 제니에게 고향은 그저 모래에 묻힌, 자신이 떠나온 곳으로만 인식되고 있을 뿐이다.

  이후 제니는 그녀를 가정부이자 섹스파트너로 고용한 한 남자에 의해 서울의 한 부잣집에서 살게 된다. 

그리고 모든 것은 갑자기 얼마나 쉽게 좋아지게 되었는가. (…중략…) 제니는 곧 일곱 가지 종류의 샐러드드레싱 만드는 법과 각종 오믈렛, 시칠리아식 해물 파스타, 인도식 정통 카레, 각종 일식 덮밥 만드는 법을 익힌다. 그리고 튼튼한 스타킹과 양말을 싸게 파는 상점의 위치, 하루 중 빨래가 가장 잘 마르는 시간대, 질 좋은 한우를 파는 정육점, 진짜 국산 쌀을 사용해 떡을 만드는 떡집, 화학 조미료를 사용하지 않는 분식집, 유기농 야채를 저렴하게 살 수 있는 인터넷 사이트, 정통 재래식 된장을 살 수 있는 반찬집의 정보 등을 훤히 꿰뚫게 된다. (…중략…) 모든 것이 완벽하다

 

 제니는 이와 같이 점차 서울 중산층의 생활 감각을 체득해 나간다. 그리고 제니는 “모든 것이 완벽하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도 잠시, 제니는 다음과 같이 발화한다.   

창밖으로 펼쳐진 하늘은 안 좋은 색을 띤다. 바닥에 깔린 회색 카펫에서는 안 좋은 냄새가 난다. 침대 곁의 등은 안 좋은 빛을 낸다. 냉장고에 든 물은 안 좋은 맛이 난다. 욕실에 있는 샴푸에서는 안 좋은 향이 난다. / 모든 게 안 좋다.

 

그리고 제니는 서울의 고급 아파트를 떠나 자신이 원래 살던 곳과 비슷한, 마약에 취한 이들이 모여 사는 한 낡은 아파트로 도피한다.
  앞서 설명한 바처럼 도시 공간에서의 정체성 형성에 크게 관여하는 존재로서의 고향이 무너진 이들은 그렇지 않은 이들에 비해 도시 안에서 자기 정체성을 확립하고 또 이에 적응해나가는 데에 어려움을 겪는다. 여기서 또한 ‘이향의 계층성’을 살펴볼 수 있다. 이는 소설 속 다른 조선족 여인과 제니의 비교를 통해 더욱 선명하게 드러낼 수 있다. 

조선족 여자는 조선족이라는 것을 제외하면 제니와 모든 것이 다르다. 그녀의 한국 체류는 합법이다. 중국엔 그녀를 기다리는 가족이 있다. 그녀는 가정부로 일하며 번 돈 모두를 가족들에게 보낸다. 그리고 그녀에게는 나라가 있다. 그녀가 항상 소지하고 있는 붉은색 여권이 그것을 증명한다. 그녀는 중국을 사랑하고, 중국 또한 그녀를 사랑한다. 그녀의 나라, 전 세계 인구의 반을 먹여 살리는 중국은 현존하는 가장 위대한 공산주의 국가다.

 

인용문 속 조선족 여자에게 있어 고향이란 가족이 있고, 자신이 힘들게 번 돈을 모두 보내면서까지 지키고 싶은 ‘그리운 곳’이다. 이러한 의식은 그녀로 하여금 열심히 살아야 하는 이유 등을 제공하며 한국에서의 정체성을 흔들리지 않게 하는 정신적 지지대가 된다. 그러나 제니는 어떠한가. 제니에게 고향은 모래’, 즉 언제라도 흩어져버릴 수 있는 불안정한 존재일 뿐이다. 이는 제니가 다음과 같이 절규하도록 만든다.  

난 아무것도 아니니까! / 한국 사람이 아니니까! / 중국 사람도 아니지! / 엄마도 없어! 아빠도 없어! / 가족이 없다고! / 돌아갈 데가 없다고! / 그러니까 난 아무것도 아니라고! / 아무것도 아닌 게 뭔지 알아? / 모르겠지! 알 수가 없겠지! / 평생 죽었다 깨어나도 알 수가 없겠지! / 하지만 괜찮아! 왠지 알아? 왠지 알아? / 왜냐하면, 어, 왜냐하면……. // 모래바람이불어오고있다멀리서어멀리서아직은아주멀다하지만곧 다가와아주 가까워져어여기로 온다 우리모두를 우리의머리위로 쏟아져 내린다아무도벗어날수없어 끝없이몰려온다그게모두를죽일거다죽는다죽는다아무도 살아남지못한다끝이다끝끝끝끝 끝끝끝끝어세계가끝이 납니다 조심하시오피할수없다멸 망멸망멸망파괴 파괴 파괴피하는방법은 없다아무것도없다그러니 조심하시오 무진장 조심하시오 방법은없다피하시오깊은 곳으로 피하시오더깊은 곳으로 가시오 피하시오 더 깊은곳으로깊은곳으로 깊이아주 깊이아주깊이더더더더 더

 

똑같이 연변에서 한국으로 건너온 조선족 여자일지라도 이처럼 고향을 ‘그리운 곳’으로 인식하기도, ‘나를 떠밀었던 곳’, 나아가 ‘나를 멸망·파괴하는 곳’으로 인식하는 등 차이를 보인다. 즉 <테러의 시> 속 이와 같은 제니의 절규는 ‘공동체의 이상적 유토피아’로 상정되어 오던 고향이 부정되고, 물리적 고향을 떠나온 이들을 더 이상 ‘공동체’라는 이름 아래 하나로 바라볼 수는 없게 되었음을, 즉 이들 사이에서도 고향에 대한 인식에 있어 계층성이 형성되어 있음을 잘 보여준다고 하겠다.

 

글 / 국어국문학과 4학년 이한나

우연히 틀게 된 지루한 명화 시리즈. 그 방송 프로그램에서는 히치콕 시리즈를 방영하고 있었다. 평소 같았으면 그냥 지나쳤을 텐데 나도 모르게 그때 나오고 있었던 영화를 끝까지 보고 있었다. 그 작품이 바로 <사이코>다. 히치콕의 명성을 알고 있었지만 히치콕 영화를 무수히 패러디한 다음 세대 감독들의 영화에 물들어져 있던 나는 수많은 감독들에게 영감을 준 명작 ‘사이코’의 가치를 그 당시에는 정확히 알 수 없었다. 그저 반전 영화의 뻔한 공식을 따른 영화라고만 생각했다. ‘사이코’가 뻔한 공식의 원조였다는 것을, 그 당시에는 정말 파격적인 영화였다는 것을 나는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하지만 충분히 지나쳤을 법도 했는데 왠지 모르게 그 영화를 끝까지 보고 있었던 이유는 아직도 모르겠다. 어린 나도 감독의 천재성을 알게 모르게 인지하고 있었던 것 아닐까?라는 짐작만 가게 된다.   

그러다 최근에 히치콕에 대한 영화를 찍는다는 것을 듣게 되었고 이 영화의 원작이 된 책을 찾다가 <완벽한 서스펜스의 탄생 히치콕과 사이코>를 알게 되었다. 책은 제목 그대로 히치콕과 사이코에 대한 논픽션이다. ‘사이코’의 그 당시 제작진들과 배우들의 인터뷰와 당시 언론에서 볼 수 있었던 히치콕의 발언들을 통해 ‘사이코’의 제작 과정을 재구성한다. 책에서 히치콕은 관객들이 ‘사이코’를 보면서 그들 스스로가 관음증 환자 되어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게 영화를 찍었다는 내용이 나온다. 저자가 그러한 히치콕의 정신을 잇기 위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책을 읽다 보면 ‘사이코’가 상영되기까지의 전반적인 제작 현장을 몰래 옆보고 있는 느낌이 든다. 그리고 이 제작과정 중심에 히치콕이라는 인물이 있다.

 

왜 히치콕은 천재라 불리고 지금까지 회자 되고 있는 것 일까? 책에서 비쳐진 히치콕은 자신의 능력에 대해 자부심도 강하고 부르주아 정신이 투철했으며 독특한 취향을 갖고 있는 괴짜였다. 히치콕이 영화를 만들 때 마다 영화 소품을 제작하는 걸 좋아하고 배우들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은 이 책을 읽고 얻은 수확이었다. 이런 개별적인 특징이 모여 만들어진 히치콕의 형상은 새로운 패러다임의 영화를 찍기 위해 누구보다 고뇌하고 노력하는 열정적인 창작열을 가진 중년 아저씨였다. 전문가들은 어떤 예술이 더 훌륭한지에 대해 많은 논쟁을 하며 나 역시 여러 문화생활을 하면 예술과 광기의 흐릿한 경계에 당혹스러울 때도 있지만 이 책을 보고 나서 훌륭한 예술이라고 말할 수 있는 기준 중 하나가 남들이 쉽게 포착 할 수 없는 시선으로 그들에게 영감을 줄 수 있는 작품을 만드는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스쳐갔다.

 

사이코의 제작과정을 통해 본 히치콕. 그의 새로운 작품에 대한 열망과 치열한 노력은 앞으로 내가 어떤 삶을 살아갈지에 대해 많은 영감을 줬다.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히치콕은 나에게 정말 훌륭한 멘토임은 분명한 것 같다.

 

   글 / 산업시스템공학과 2학년조혜미

서평단 트레바리 “피로사회” 후기

 12월 13일 목요일 오후 6시. 중도 지하2층의 세미나실에 모인 10명의 사람들. 시험공부로 정신없을 시간이었기에 다들 지친 것 같았지만 모두의 눈은 초롱초롱 했다. 바쁜 대학생활 와중에서도 한 달에 한번 트레바리 사람들과의 만남은 나에게 있어 청량제와 같다. 전공을 떠나 이 순간만큼은 책 이야기고, 책 생각뿐이다.

 

“피로사회”라니!

  이 세상이 피곤하다는 것일까? 사회가 피곤을 준다는 것인가?
처음 읽는 사람에게는 말이 무척 어렵고 복잡할 수 있었다. 하지만, 트레바리의 멘토 박용재 선생님의 해설을 들으면서 더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이 피로사회의 내용은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따끔한 일침을 준다. 

 우리는 흔히 아무것도 안하는 것, 머뭇거리는 것, 하지 않는 것을 부정적으로 생각한다. 이 세상을 살아나가기 위해서는 무언가를 끊임없이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심화되어 멀티태스킹이 당연한 사회가 되었다. 우리는 스마트폰을 만지며 공부를 한다.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공부를 한다. 바쁜 사회 속에서 많은 일을 효율적으로 처리하기 위해서 멀티태스킹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해왔다. 

 하지만 멀티태스킹은 동물적인 삶을 의미한다. 늑대는 먹이를 먹으면서 자신을 해치는 짐승이 있는지 끊임없이 경계하면서 먹는다. 따라서 먹는 것을 즐겁게 먹지 못한다. 그들에게는 정신적인 이완이 없다. 끊임없이 긴장하며 살아야한다.

 한병철이 말하는 피로사회는 나아가서 누군가 통제 하에 일을 했던 과거와 달리 현대사회는 스스로 자신을 통제하여 누가 시키거나 보지 않아도 일을 하며, 스스로가 규율에 맞춰서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제는 억압이 없지만 스스로를 통제하며 사는 사회가 되었다.

 우리자신은 어떠한가? 우리는 남보다 뒤처지지 않기 위해서 자발적으로 공부한다. 시키지 않아도 새벽에 일어나 영어 학원을 다니고, 밤늦게 까지 공부한다. 그렇게 일을 하는 것이 자신을 위한 것인가? 아니면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한 것이란 판단에서 자신에게 일을 스스로 시키고 있는 것인가? 스스로 회의하고 질문해야 할 필요가 있다.

 원인을 찾아보면 역시나 후기자본주의의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한다. 후기자본주의는 지배계급이 자본가가 아닌 고등교육을 받은 지식전문가가 지배계급이 되는 시대이다. 따라서 이제는 초등학교 때부터 지배계급(지식전문가)이 되기 위한 경쟁을 한다. 교육수준이 신분을 결정하는 사회이기 때문에 누구나가 공부에 매달리게 되며, 또한 사회에 진출할 경우 근무외 수당이란 것이 생기면서, 일을 하라는 통제가 없어도 자연스럽게 야근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타율적인 착취가 아니라 자율적인 착취이다.

 

해결책은 “?” 이다!

 우리는 스펙의 시대를 살고 있다. 직무와 관련이 그렇게 많지 않지만 남들에게 뒤처지지 않기 위해 자격증을 준비하고, 영어를 배우기 위한 어학연수가 아닌 보여주기 위한 어학연수를 가는 것은 예삿일이 아니다. 왜 우리는 이런 것에 목을 매고 있는 것인가? 

그런 것에 관해 혹시 의문을 가져본 적이 있는가? 의문을 가지고 머뭇머뭇 거렸다면 그것은 쓸데없는 활동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것이다.

우리는 대학생이다. 우리는 젊다. 젊다는 것의 장점은 무엇인가?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것. 처음부터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융통성이 있다. 이것은 대학생의 특권이다. 즉, 고정관념을 깨는 게 쉽다는 뜻이다. 고정관념을 깨면 다른 세계를 볼 수 있게 해준다. 비록 그동안 생각해왔던 것을 모두 허물어뜨리기 때문에 벌거벗은 것같이 두려울 수 있지만, 그것이 오히려 자신을 성장시키는 계기가 될 것이다.

 우리는 지식의 역사를 부정에서 출발한다. 즉, 모든 지식은 회의론에서 시작하였다. 회의론이란 것은 뭐든지 의심으로 보는 것을 말한다. 회의론자 데카르트는 고정관념을 깨고 자신의 지식을 찾는 여행을 하기위해 내 자신이 생각하므로 ‘존재 한다’ 에서 시작하였다. 그러므로 회의하며 머뭇거리는 사람을 무능력자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그런 사람을 그렇게 바라보는 것은 이 시대의 틀(패러다임)에서 생각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패러다임을 깨기 위해서는 의문과 회의하는 과정을 거쳐야 하며, 이런 과정을 통해서 우리는 남들과는 한 차원 앞서서 생각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오히려 피해왔던 빈둥빈둥하며 주저하고 회의하는 태도가 오히려 우울감을 벗어나게 해줌을 깨달아야 한다.

 

피로가 아닌 행복해지기 위한 시작.

   
 우리는 이유 없이 우울하다. 우울하다는 것은 대상이 있어야 하지만 이 세상은 내 자신이 착취대상이기 때문에 대상이 없고, 그런 와중에도 내 자신은 점차 소진되어 간다.
 누군가가 이렇게 물을 수 있다. “그럼 아무것도 하지 말고, 도태되란 말인가요? 세상은 빨리 흐르고 있고, 사람들은 이렇게 치열하게 살고 있는데요?”
 이렇게 생각할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아예 정지해 있으란 것이 아니다. 행동으로 바로 실천하라는 것이 아니다. 한번쯤은 머뭇거려보자는 것이다. 머뭇거리는 것이 나쁘지 않다는 것이다. 이 사회 환경이 머뭇거리는 것조차 낭비라고 생각하는 세태가 문제다.
 또한 창의적인 생각들도 우리의 정신적인 영감과 창조적인 생각은 이완된 상태에서 나온다. 긴장하고 경직된 상태에는 새로운 생각이 나오기 힘들다. 이렇게 이완은 우리에게 뛰어난 영감을 주기도 한다.
 지금도 여러 가지 대외활동과 각종자격증, 어학연수 등 방학을 방학으로 생각하지 않고 바쁘게 보내는 학생들이 있을 것이다. 그런 학생들에게 말하고 싶다.

“한번쯤은 머뭇거려보세요. 지금 당신이 하고 있는 것이 당신에게 큰 도움이 되고 있는 것인가요? 성과를 이루기 위한 수단인가요? 당신의 마음이 진정으로 하고 싶었던 것은 무엇인가요?”

 

 1시간 가량의 토론이 끝나고 한숨을 쉬었다. 다들 시험공부가 기다리고 있는 피로사회로 돌아가야 할 것 같다고 이야기 했다. 뒷풀이를 하긴 했지만, 곧 있을 시험이란 압박 때문에 편하게 뒷풀이를 하지 못하는 것을 보며, 나 또한 어쩔 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동안 방학이란 것은 쉬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왔다. 전역하고 바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자격증공부를 하며 복학준비를 했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야 옳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피로사회를 읽으며 나도 조금은 이완해도 되지 않을까란 생각을 해보았다. 그동안의 시간이 있다면, 담양의 메타세콰이어 길도 걷고 싶고, 영화도 미친 듯 보고 싶고, 편히 소파에 앉아 책도 읽고 싶다고 생각해보았다.
 대학생활을 지내고 보니 어느덧 4학년이 되었다. 비록 내게 남은 시간은 많지 않지만, 조금이나마 피로를 덜 수 있기를, 2013년에는 숲을 처음 들어갔을 때의 그 상쾌함을 느낄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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