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시화의 시는 ‘발명’이 아닌 ‘발견’이다

 

5월 뉴스레터 서평으로 류시화의 《외눈박이 물고기의 사랑》을 정한 이유는 류시화 시인이 지니는 특이성 때문이다. 사실 류시화 시인은 문단과 언론에서는 인정 받지 못하는 시인이다. 지금 내가 평하려는 이 시집 역시 문단에서는 "저급함도 역겨움도 모르는 외눈박이 독자들에게나 매혹적인 시집"이라 혹평을 받기도 했다. 문단은 대중의 심리에 부응하고 세속적 욕망에 맞춰 쓴 것은 시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또한, 시는 대중에게 다가가는 글이 아닌 대중이 노력하여 다가가야 하는 장르인데, 류시화 시인의 글은 전자에 속한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독자가 바라보는 시인 류시화는 다르다. 류시화의 시집은 십여 년에 걸쳐 수십 번 베스트셀러에 올랐고 대학생이 가장 좋아하는 시인에 당대의 문인 윤동주, 김소월, 한용운과 함께 이름을 올렸다. 대중의 입맛에 맞아떨어지는 시란 것이다. 나는 대중 위에 군림하여, 대중에게 다가가는 시가 아닌 대중이 다가가야만 하는 시가 문학적 가치를 더 지니는 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어려운 시는 그 나름의 재미가 있고 대중에게 다가가는 시는 그 나름의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뜻에서 대중에게 다가가는 류시화 시인의 시를 다른 학생들에게 소개하므로 더 많은 사람이 시가 어려운 것만은 아니며 충분히 공감하고 스스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을 알리고 싶어 이 시집을 서평 하게 되었다. 나아가 이 시집을 통해 더욱 다양한 시에 관심을 두는 사람이 생긴다면 무척 기쁠 것 같다.


내가 류시화의 시의 시를 접하게 된 계기는 우연이었다. 고등학교 시절의 문학 교과서도 아니고 모의고사 지문도 아니었다. 그냥 인터넷 서핑을 하던 중 류시화의 〈속눈썹〉을 우연히 알게 되었고 류시화 시인의 시집을 한 번 읽어 보았다. 그리고 대학에 와서 여러 가지 형태의 문학을 접하며 집에 있던 류시화 시인의 시집을 한 번 더 읽어 보았고 나의 시에 관한 관심은 더욱 커졌다.


류시화 시인의 시들은 거의 변하지 않고 같은 시 세계를 유지하고 있다. 필요 이상의 시적 상징이나 은유의 사용으로 말미암은 모호한 느낌을 지양하고 일상언어의 직조와 보통의 구문을 통해 신비의 세계를 그려내고 있다. 낯익음을 통해 낯섦을 만들어내는 ‘발견’. 류시화의 시는 ‘발명’이 아닌 ‘발견’이다. ‘발견’이 있어야 ‘발명’도 있다. 이러한 시 세계는 《외눈박이 물고기의 사랑》에 수록된 <빈 둥지>, <신비의 꽃을 나는 꺾었다>, <저편 언덕>, <지금은 그리움의 덧문을 닫을 시간>, <나무는>에서 역시 발견된다. 숲 속 나뭇가지 위의 둥지가 빈 둥지였음과 ‘신비의 꽃’을 꺾는 순간 폐허로 변하는 화원과 맞닥뜨리는 일을 통해 환영(幻影)이 환영(幻影)임을 확인하는 것을 보여주고 그 때문에 무참해진다. 그리고 밖으로 난 ‘그리움의 덧문’을 닫고 슬픔을 가만히 들여다보게 된다. 슬픔을 객관화하는 순간, 슬픔은 슬픔을 벗어난다. 슬픔으로 가서, 그 슬픔을 뚫어지리라 바라보아야 슬픔을 넘어서며 새로운 발견들이 뒤따를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밖으로 난 ‘그리움의 덧문’을 닫으면 새로운 발견들이 뒤따른다. 시인의 <소금별>을 보면, 소금 별에 사는 사람들은 소금 별이 녹아버리기 때문에 눈물을 흘리지 못한다. 그러나 눈물을 흘릴 수 없다는 절망은 소금별 사람들로 하여금 눈을 깜빡이게 한다. 소금 별이 더 많이 반짝이는 건 그 때문이다. 모두 다 다른 시지만 한 편의 옴니버스식 구성의 영화를 보는 듯하다.

 


내가 우연한 기회에 시인의 시를 접했듯 나의 서평을 우연히 접하는 사람이 있어, 그 사람이 류시화 시인의 시를 ‘가벼움’으로 치부하는 치기와 현학적 태도를 접어두고 시 자체를 읽고 더 나 나아가 ‘시’라는 장르에 빠져드는 기쁨이 있다면 굉장히 행복할 것 같다. 

                                                                                                                        글 / 수학과 3학년 정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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