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에서 경제학을 배우면서 자주 접하게 된 말이 있다. 바로 ‘파이’라는 말인데, 표면적인 뜻 그대로 ‘사과나 포도 시럽 따위로 토핑한 간편하게 먹을 수 있는 맛있는 음식’이라는 의미를 가진 이 말은 흔히 경제성장과 분배의 관계를 논할 때 많이 쓰이고 있다.

 

 하나의 파이가 있고 네 명의 사람이 있다면 파이를 네 조각으로 나누어 분배해야 한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큰 조각을 가지고 어떤 사람은 작은 조각을 갖는다. 그것이 개인의 능력 탓이건 사회적 구조 탓이건 파이가 공평하게 분배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만약 작은 조각을 가진 사람이 더 많은 파이를 먹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의 파이를 빼앗거나 훔쳐야 한다. 즉, 파이의 절대량을 전제할 때의 분배는 제로섬의 법칙을 벗어날 수 없다.

 주류경제학자들은 이렇게 주장한다. 파이를 나누는 것만 생각하지 말고 파이 ‘자체’를 크게 만든다면 자연스럽게 모든 사람이 더 많은 파이를 먹을 수 있지 않겠느냐고. 일견 굉장히 설득력 있는 말이다. 나 역시 경제학도로서 4년에 걸친 대학 생활 내내 ‘큰 파이 만들기’ 논리에 경도되어 있었고 국가는 당연히 지속적인 경제 성장을 당연하면서도 필연적인 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월든’의 가장 첫 번째 목차의 제목은 ‘숲 생활의 경제학’이다. 헨리 데이빗 소로우의 경제학은 나에게 경제 성장의 당위성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했다. 거의 무일푼에 가까운 30세의 젊은이가 자연으로 들어가 자급자족하며 생활하면서 깨달은 경제학은 현대의 주류 경제학과는 궤를 달리하는 것이었다. 폐자재를 활용하여 자신만의 오두막을 짓고, 하루에 한 끼의 밥상을 차리며 집기라고는 밥그릇과 수저 한 벌, 그리고 책 한 권 뿐. 상품의 무한한 생산과 판매, 신 시장의 개척을 미덕으로 삼는 현대의 상품화폐경제와는 추구하는 목적부터가 전혀 달랐던, 오직 스스로 한 몸을 건사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숲속 경제학의 목적은 달성된다는 것이었다.

 

 “사람들이 수레와 헛간으로 피할 때 그대는 구름 밑으로 피하라. 밥벌이를 그대의 직업으로 삼지 말고 도락으로 삼으라. 대지를 즐기되 소유하려 하지 마라.”

책 곳곳에서 언급되는 소로우의 말은 3년 전 입적하신 법정스님의 무소유 정신을 떠올리게 한다. 법정스님 역시 무소유의 즐거움을 설하며 소유를 놓음으로써 비로소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고 말한다. 오늘날 우리나라의 젊은이들에게 꿈을 묻자면 대부분 10년 안에 자신 소유의 집을 서울에 마련하는 것, 고급 자동차를 소유하는 것과 같은 답변이 돌아온다고 한다. 하지만 인간의 삶이 단지 집을 마련하거나 무언가를 가지기 위해 존재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좀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좀 더 많은 것을 갖기 위해 몰두하는 사이 우리 인생에 진정 소중한 시간이 지나가버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일전에 같은 학교 사회학도인 친구와 경제 성장을 주제로 장시간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당시 고전파 경제학이론에 경도되어 있던 나는 자연스럽게 경제 성장은 결과적으로 전체 국민에게 돌아가는 몫을 크게 하여 결과적으로 더 많은 사람들이 행복해진다는 주장을 폈다. 반면 나와는 전혀 다른 입장에서 맞서던 그 친구의 이야기 중 ‘월든’을 읽고 생각해보니 굉장히 흥미롭게 생각되는 말이 있었다. 바로 ‘제로 성장론’ 이 그것이다.

 친구는 절대 빈곤에 시달리는 국가들을 제외하고 적어도 우리나라 정도의 경제 규모를 가지고 있는 나라라면 더 이상의 경제성장이 사실상 불필요하다는 의견을 말했다. 이미 전 국민이 풍족하게 먹고 사용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많은 물품이 생산되고 있고 이는 환경오염과 사회적 갈등을 낳는 판도라의 상자라는 것이었다. 당시 나도 그 의견에 일면 동의했던 것이 과거엔 우리 사회에 존재했던 유일한 욕구가 질병에 시달리지 않고 하루 삼시 세끼만 잘 먹을 수 있는 것이었는데, GDP가 수십 배로 성장하고 평균수명이 늘어나고 굶주림이 없어진 오늘날에는 또 다른 욕구들이 이전보다 훨씬 더 복잡하게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최초의 욕구가 해소되면 곧 바로 또 다른 욕구를 갈망하기 때문에 이러한 뫼비우스의 띠를 경제 성장과 개발만으로 해소하는 것은 영영 불가능하다.

 

 친구의 제로 성장론을 듣고 또 월든을 읽고 난 지금, 우리가 하루라도 없으면 못 견딜 것 같은 인터넷, 스마트폰이 없던 시대를 생각해 보았다. 90년대 중고등학교를 다니고 있던 나는 인터넷과 스마트폰이 없이 놀이터에서 친구들과 놀고 책을 읽으면서 그 어떤 결핍도 느끼지 않았었다. 하루 500원의 용돈에 즐거워했고 친구들과 함께 산과 들, 강으로 떠났던 모험은 성인이 되어 수백만 원을 들여 간 해외여행보다 더 소중한 추억으로 뇌리에 새겨져 있다. 분명히 세계는 더 ‘편리’해 졌지만 더 ‘좋아’지지는 않았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책의 제목인 월든을 보고 문득 궁금해져 영어사전에 Walden을 검색해 보았더니 ‘숲속의 생활’ 이라는 검색 값이 나왔다. 숲속의 생활, 인간은 태초에 대자연에서 탄생했지만 이제는 숲속의 생활을 버리고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도시로 몰려가고 있다. 경제성장과 과학 기술의 발전을 모든 문제 해결에 대한 전가의 보도처럼 무분별하게 휘두른 결과 이제 인류는 온난화와 사막화, 그리고 지구 자체를 파멸로 몰고 갈 수 있는 원자력의 위험성에 노출되게 되었다.

 

 경제 성장을 통해 이루고자 하는 파이의 모습은 우리가 마음속에 담고 있는 파이와 정확히 일치한다. 그리고 마음속의 파이는 경제성장과 개발이 현실세계의 파이를 키우는 만큼 계속해서 커져만 간다. 이제 우리는 지나친 욕심을 지양할 때가 되었다. 후쿠시마 원전사고와 녹고 있는 빙하는 무한대로 커져 가는 인간의 파이에 대한 자연의 정지 신호다. 인간의 행복은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는지, 어떤 사람들과 교류하는가에서 나오지 서울에 아파트를 사거나 고급 승용차를 타는 데서 나오지 않는다. 이제 충분히 전 세계의 인류가 먹고 소비할 수 있는 생산력을 확보한 지금 우리는 제로 성장론과 소로우의 교훈을 진지하게 고민할 때가 되었다.

이제 우리 마음 속의 파이를 천천히 줄여 가자. 보다 더 나은 내일을 위해.


글 / 일반대학원 북한학과 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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