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미학으로 읽는 진중권의 시선’을 듣고..


  

  얼마 전 교내 중앙도서관의 주최로 진중권 교수님의 강연이 열린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제발 청강할 수 있게 해주세요 하고 마음속으로 굳게 빌어 왔다. 청강이 확정된 순간, 벅차오르는 가슴을 어떻게 막을  수 있었겠는가. 고등학교 시절 논술을 공부하며 어렵게 읽었던 진교수님의『현대미학강의』를 4년만에 실제로 강단에서 듣게 되다니!

 

 

   그의 강연을 온전히 즐기기 위해선 그의 책에서 꾸준히 다뤄왔던 현대예술에 대해 어느 정도 이해가 필요하다. 현대예술은 ‘숭고’와 ‘시뮬라크르’라는 서로 대립하며 보완하는 두 개념을 통해서만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의 핵심이다. ‘숭고’ 무거움과 그것을 파괴하는시뮬라크르’ 가벼움이 함께 존재하는 것이 현대예술이라는 것이다.
   고전시대에서는 예술이 곧 미(美)이고 이상화된 재현이라고 생각해 왔다. 이러한 관념은 현대에 들어와 비약적으로 발전한 과학기술의 영향과 500년여 간 끊임없이 소진해온 창조력의 고갈로 인해 무너지고 말았다. 이성적인 현대인들의 사고로는 낭만주의의 감성적인 고전예술을 재현하기 힘든 시대가 온 것이다.
   예술이 표현하는 현실(reality)을 사진이 빼앗아가자 예술은 두 가지 갈림길에 놓이게 된다. 현실을 초월하거나, 그도 아니라면 현실을 복제하는 것이다. 여기서 ‘시뮬라크르’의 개념이 필요하다. 시뮬라크르란 원본이 없는 복제를 말한다. 복제에는 당연히 원본이 존재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서로 상호 복제한 복제물이 너무나 많기 때문에 원본이 무엇인지 찾을 수 없는 것이다. 복제를 택한 예술의 대표적인 예를 앤디워홀의 작품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마릴린먼로의 모습이 아닌 마릴린먼로의 사진을 보고 그린 그림에서 그러한 속성이 드러난다. 사진은 마릴린먼로의 복제물이며, 그것을 보고 그린 그림도 복제물, 즉 그의 그림이 시뮬라르크, 복제 그 자체가 되는 것이다.


   고전예술이 그 자체가 미(美)이며 이상이었기에 관찰자에게 정서적 만족감을 안겨 주었다면, 현대예술보는 순간 인간을 당혹하게 만든다. 이우환 화백의 <Correspondence>는 현실을 초월한 예술을 보여준다. 이 작품은 하얀 도화지 위에 점하나가 전부다. 우리는 여기서 고개를 갸우뚱하게 된다. ‘도대체 이게 왜 예술이야?’ 현실을 초월한 현대예술을 이해하기 위해선 예술을 예술이 아닌 충격으로 받아들이는 과정이 필요하다. 인식의 전환을 통해 얻는 미적 감정의 고양이 감상의 핵심이다. 과거의 예술이 작품 그 자체에 미의 속성을 두었다면, 현대 예술은 작품 감상의 과정 자체가 미로 전환되는 것이다.
   이제 숭고에 대해 이야기해야 할 순간이다. 포스트 모더니즘 사회에 와서야 과거에 간과했던 사실들에 대한 논의가 생겨났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자연 숭고’ 이다. 옛부터 인간은 자연에 대한 ‘공포’를 이겨내기 위해 기술을 통해 자연을 정복하고자 하였으나, 이제 그러한 기술이 도리어 우리를 파괴하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엿볼 수 있다. 자연과 싸워 이겨내기 위해 기술을 발전시켜야 한다는 근대적 시각이 이제는 시대착오적 발상으로 변모하게 된 것이다. 우리에겐 여기에 대한 반성과 함께 기술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모색하는 일이 남겨져 있다.
   프랑스와 영국의 두 가지 정원을 비교해보자. 프랑스식 정원은 바로크 시대의 산물로 자연을 기하학적으로 해석하였다. 정원에 존재하는 모든 불규칙함을 곧은 선으로 치환하여 자연을 정복한 ‘인간의 숭고함’을 강조한 것이다. 반면 낭만주의의 영향을 받은 영국식정원은 그것이 정원인지 아닌지 구분조차 애매하다. 사람의 손이 닿았을망정 언뜻 보기엔 자연 본연의 모습 과 다른 점이 없다. 자연에 순응하는 것이 오히려 더 아름답다고 생각한 것이다. 동양에도 이러한 시각의 차이가 발견되는데, 향나무를 가지 쳐 정교하게 산의 형상을 재현한 일본식정원과 달리, 한국식정원은 자연을 그저 내버려두어 자연을 그대로 즐기는 것을 미덕이라 보았다. 어쩌면 손이 닿지 않아 투박함마저 느껴지는 정원이다.

   일본과 한국의 정원은 모두 자연의 모방이지만, 그 속에 내재된 관점은 전혀 다르다. 일본의 것은 자연을 단순히 모방한 ‘이미타시오(imitatio)’인 반면, 한국의 것은 객체(자연)에의 동화의 의미를 담은 ‘미메시스(mimesis)’이다. 산업화의 시대에서는 ‘이미타시오’가 비약적 발전을 가능하게 했지만, ‘이미타시오’의 세계에서는 보안과 개신만이 있을 뿐 앞서나가기 위한 ‘창조’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이미타시오’만을 추구하는 사회에서는 인간만 존재할 뿐 자연은 상실된다. 

        

   수 년전 독일에서는 도시개발의 일환으로 지하철을 만드는 논의가 있었는데, 이때 지역 주민들의 반발이 거세어서 차질을 빚은 일이 있다. 지하철을 놓게 되면 그 소음과 피해로 땅속에 사는 두더지와 개미들이 살 수 없지 않겠냐는 말이었다. 개발을 최우선으로 계획하는 우리의 현 가치관으로는 조금 얼토당토한 주장일 수 있지만, 자연을 존중하며 자연과 공생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는 독일국민의 생각이야말로 진정으로 이 시대에 필요한 현대적인 가치가 아닐까? 실제로 지금 서양에서는 댐을 부수고 자연적인 물길을 흐르도록 조성하는 등 인공의 재자연화가 진행되고 있다. ‘이미타시오’에서 ‘미메시스’로의 전환이다.

  

 

글 / 국제통상학과 3학년 전유진

 

=============================================================================

유영만 교수님의 강연을 듣고

 

   처음 에코토피아 수업을 들으면서 알게 된 ‘브리꼴레르 Bricoleur’ 라는 말이 이제는 익숙해 진 듯하다. 책상형 인재가 아닌 실천형 인재, 스스로 도전하고 몸으로 부딪히며 새로운 지식을 창조해가는 지식의 연금술사, 야생적 사고로 무장하여 자신이 가진 도구를 이용해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맥가이버형 인재. 이 모두가 미래를 이끌어 나갈 새로운 인재상, 브리꼴레르이다.


 - 창조는 99%의 남의 것과 1%의 내 것으로 이루어진다 -

   ‘하늘 아래 새로울 것은 없다‘던 빌 게이츠의 말처럼 이미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고, 또 알아 가고 있다. 남들과 다르게 살기 위해서 전에 없던 무엇을 찾으려고 골머리를 썩기 보다는 기존의 것을 새롭게 조합하고 익숙한 것을 낯설게 만들라던 유영만 교수님의 말씀이 인상적이었다. 이것이 진정 우리가 가져야 할 융합형 인재의 덕목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건축 설계수업을 들으면서 유명 건축가의 작품이나 잡지의 작품들에서 본 형태나 기능들을 나도 모르게 내 프로젝트 안에 넣게 되는 경우가 있었다. 그럴 때마다 그 작품들을 베꼈다는 생각에 부끄럽게만 생각했었는데 이번 강연을 통해서 남의 것에 영향을 받더라도 나의 것으로 소화시키고 새롭게 만들어 갈 수 있다면 그것 또한 나의 능력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 야생(野生)에서 야성(野性)을 가진 자가 야망(野望)과 야심(野心)을 가질 수 있다 -
 

   강연을 듣기 전에 『브리꼴레르』를 읽었다. 책을 읽으면서도, 강연에서도 교수님의 언어 유희적 문장들은 감탄을 자아냈다. 책의 서론 부분에는 교수님의 하루 일과가 나오면서 독서습관에 대한 내용이 나온다. 우리가 수업시간에 배운 하이퍼텍스트적 읽기를 하고 계셨다. 그리고 강연에서도 독서의 중요성을 거듭 강조해주셨다. 끈임 없는 독서와 글쓰기 습관이 지금의 교수님을 있게 한 원동력이 아닐까 싶다.

 


 

나도 독서를 많이 하기 위해서 늘 노력하고 있지만 시간을 내어 독서를 하기는 쉽지 않은 것 같다. 독서세상을 보는 창이라고 말씀하셨다. 책 한 권을 읽은 사람은 두 권 읽은 사람을 이길 수 없다는 말을 되새기며 남는 시간에 책을 읽는 사람이 아니라 책을 읽고 남는 시간에 다른 일을 할 수 있는 마음가짐을 가져야 겠다.

 하루하루는 성실하게 살고 싶고, 인생 전체는 되는 대로 살고 싶다 – 이동진 [밤은 책이다 中]

   강연을 들으면서 나는 너무 멀고 큰 계획과 목표만을 가지고 살았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오늘 하루를 열심히 살지 못하면서 큰 꿈을 이루려고 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語不成說) 인 것 같다. 가끔은 일탈도 하고, 남들이 피하는 일에 도전도 하면서 지금 이 순간에 열심히 살다 보면 나중에 내가 살아온 길을 뒤 돌아 보았을 때 후회 없이 잘 살았다는 생각이 들 수 있을 것 같다.

          

     책을 읽었을 때보다 직접 강연을 들으니 더 느껴지는 바가 많았다. 이런 좋은 기회를 마련해주신 정연정교수님께 감사드리고, 또 좋은 말씀으로 나 뿐만 아니라 많은 학우분들에게 깊은 깨달음을 주신 유영만 교수님께 감사드린다.

 글 / 건축학과 4학년 백수진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