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사장소는 만해박물관, 백담사, 신촌민속박물관 등이었으며, 국어교육과 3학년 조은화 학생이 기행문을 기고해 주었습니다.
문학기행에 참여하지 못한 동국인 여러분!! 생생한 기행의 흔적들을 사진과함께 체감하시기 바랍니다.
‘만해 문학기행’을 다녀와서
국어교육과 3학년 조은화
1.
문득 작년 이맘때쯤 ‘가을로’라는 영화를 인상 깊게 보았던 기억이 난다. 영화의 감독이며 배우를 워낙 좋아하던 탓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그 영화가 기억에 남는 까닭은 영화의 모티브가 ‘사랑하는 사람의 자취’를 찾아 나선다는데 있어서였다. 가슴에 남은 그 누군가의 자취를 더듬어 본다는 건 사랑했던 사람의 마지막 보루(營壘)가 아닐까.
내가 이번 문학기행에 동참한 것이 위와 같은 이유라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중고등학교 시절, 유난히 문학을 좋아했던 나로서 만해의 시들은 소녀의 여린 감성을 흔들기에 충분한 것들이었다.
바람도 없는 공중에 수직의 파문을 내이며, 고요히 떨어지는 오동잎은 누구의 발자취입니까.
지리한 장마 끝에 서풍에 몰려가는 무서운 검은 구름의 터진 틈으로, 언뜻언뜻 보이는 푸른 하늘은 누구의 얼굴입니까.
꽃도 없는 깊은 나무에 푸른 이끼를 거쳐서, 옛 탑 위의 고요한 하늘을 스치는 알 수 없는 향기는 누구의 입김입니까.
근원은 알지도 못할 곳에서 나서, 돌부리를 울리고 가늘게 흐르는 적은 시내는 굽이굽이 누구의 노래입니까.
연꽃 같은 발꿈치로 가이없는 바다를 밟고, 옥 같은 손으로 끝없는 하늘을 만지면서, 떨어지는 날을 곱게 단장하는 저녁놀은 누구의 시(詩)입니까?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됩니다.
그칠 줄을 모르고 타는 나의 가슴은 누구의 밤을 지키는 약한 등불입니까.
- 만해 한용운의 ‘알 수 없어요’
대체 만해라는 인물은 어떤 삶을 살았기에, 무엇을 그토록 그리워했기에 그러한 시들을 남길 수 있었는지 항상 궁금해 오던 차였다. 그러던 중, 중앙도서관에서 마련한 ‘민족의 큰 북 만해사상을 찾아 떠나는 문학 기행’에 몸을 싣게 되었다.
2.
날씨가 흐리더니 급기야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밤은 깊어 밖은 깜깜했다. 창을 타고 내리는 무수한 물줄기와 그 사이 사이 내비치는 흔들리듯 희미한 풍경을 바라보며 몇 시간을 달
3.
‘백담사 만해마을’ (이하 만해마을)은 강원도 인제군에 위치한 곳이다. 이곳은 만해문학박물관, 문인의집, 만해학교 등의 시설로 이루어져 있으며 만해축전, 문인 창작집필 지원사업, 만해문학 아카데미 등의 사업을 하고 있다. 만해 마을은 이와 같은 시설과 사업 등을 통해 만해의 문학성과 자유사상, 진보사상, 민족사상을 높이 기리고 선양하기 위한 실천의 장으로 이용되고 있다.
우리는 만해마을에 대한 호기심을 뒤로 한 채, 아침 식사를 하고 우선 ‘백담사’에 먼저 가보기로 했다.
4.
백담사 매표소에서 백담사 입구까지는 약 7Km, 마을버스로 15~20분 정도 소요되는 거리였다. 여전히 비가 조금씩 내리고 있어서 우리는 마을버스를 타고 백담사까지 올라갔다. 마을버스를 타고 가는 내내 내 머릿속에는 오로지 한 가지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다음 기회에 백담사를 찾을 때는 꼭 걸어서 올라가야지’
이유는 백담사로 향하는 길이 너무나도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흐린 날씨 덕분에 낀 자욱한 안개와 절벽의 층계 위로 아슬하게 솟아 있는 나무들, 구불구불한 길 위로 벌써부터 떨어지는 몇몇의 낙엽과 그 아래 내다보이는 청명한 계곡의 자태는 말이나 글로써 쉽게 형용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다만 <님의 침묵>에서 떠나는 님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화자의 목소리만이 어디선가 메아리치듯 들려오는 듯 했다.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적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
.
5.
백담사는 이름 그대로 사원이다. <설악산 심원사 사적기>와 한용운의 <백담사 사적기>에 의하면 백담사는 서기 647년 신라 제 28대 진덕여왕 원년에 자장율사가 설악산 한계리에 한계사로 창건하고 아미타삼존불을 조성, 봉안하였다. 한계사로 창건 후 1775년(영조 51년)까지 운흥사, 심원사, 선구사, 영취사로 이름이 바뀌다가 1457년(세조 3년)과 1783년(정조 7년)에 최봉과 운담이 백담사라 개칭하여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다. 전설에 의하면 백담사라는 사찰의 이름은 설악산 대청봉에서 절까지 작은 담(潭)이 100개가 있는 지점에 사찰을 세운 데에서 일컫게 되었다고 한다. 백담사는 내설악의 아주 깊은 오지에 자리 잡고 있어서 옛날에는 사람들이 좀처럼 찾기 힘든 수행처였다. 수많은 운수납자(雲水衲子)가 불원천리(不遠千里)하고 이곳을 찾아 백담사 계곡을 시원하게 흘러가는 맑은 물에 객진번뇌를 털어 내고 설악영봉의 푸른 구름을 벗 삼아 출격장부(出擊丈夫) 의 기상을 다듬던 선불장(選佛場)이었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백담사가 만해와 무슨 인연이 있었던 것일까. 바로 이 백담사가 만해 가 1905년 머리를 깎고 입산수도하여 깨달음을 얻은 곳이다. 그리고 만해는 이 곳에서 <조선불교유신론>과 <십현담주해>를 집필하고 <님의 침묵>이라는 시를 발표하는 등 불교유신과 개혁을 추진하였다. 즉 백담사는 만해가 일제의 민족 침탈에 항거하여 민족독립운동을 구상하였던 독립운동의 유적지라 할 수 있다. 이만하면 우리의 발걸음이 백담사로 가장 먼저 향할 수밖에 없었던 충분한 이유가 되지 않을까.
현재 백담사에는 법당, 법화실, 화엄실, 나한전, 관음전, 산신각등 6개 동의기존 건물 외에 만해의 문학 사상과 불교 정신을 구현하기 위한 만해 기념관, 만해 교육관, 만해 연구관, 만해 수련원등의 건물이 있었다. 우리가 주로 둘러본 곳은 ‘만해 기념관’이었다. 이 곳은 1997년 11월 9일 백담사 내에 개관되었는데, 만해가 불교 개혁의 기치를 내걸고 저술한 《조선불교유신론》과 《불교대전》 원전을 비롯해, 《세계지리》·《영환지략》·《음빙실문집》 등의 책과 만해의 유묵과 시집 《님의 침묵》 초간본·각종 판본, 1962년 수여된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한용운 연구논문 등이 전시되어 있었다. 게다가 만해의 출가와 수행, 3·1운동과 옥중투쟁, 계몽활동, 문학활동, 신간회활동 등을 분야별로 나누어 한눈에 만해의 일생을 볼 수 있도록 꾸며놓기도 했다.
우리는 정종현 선생님의 설명을 들으며 만해 기념관을 살펴보았다. 선생님의 설명과 각종 기록들을 보면서 만해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는데, 그것은 만해가 생각보다 당차고 강직한 인격을 갖춘 인물이었다는 것이다. 만해의 불교개혁과 민족독립을 위한 투사적 면모는 그의 시 대부분에 연약한 이미지의 여성 화자가 등장하여 애끓는 듯한 한과 그리움을 노래하는 것과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게다가 만해는 1910년 국권이 일제에 침탈되자 중국으로 가서 독립군 군관학교를 방문하고 세계 일주의 뜻을 품고는 만주와 시베리아 등지에서 방랑생활을 하기도 했다는데, 선사의 삶과 역마(驛馬)의 삶이 내게는 꽤 역설적으로 다가왔다. 뿐만 아니라 시인으로만 알고 있단 만해가 실상은 1935년 첫 장편소설 <흑풍(黑風)>을 <조선일보>에 연재한 적도 있었다 하니, 백담사에서는 만해에 대해 개인적으로 가졌던 선입견에서 탈피할 수 있었던 신선한 경험을 한 셈이다.
6.
백담사에서 내려와 풋풋한 산나물이 가득한 밥상으로 요기를 채웠다. 설악산의 맑고 깨끗한 기운이 음식에도 가득했는지 조금은 피곤하고 나른했던 몸을 더욱 가볍게 했다.
우리는 그 길로 다시 만해마을을 찾았다. 전날 너무 늦게 도착했고 또 날씨도 좋지 않았던 까닭에 제대로 살펴보지 못했던 만해마을을 다시 둘러보기 위해서이다. 우리는 만해마을에서 만해문학박물관을 관람했는데, 이 곳 역시 만해의 저서, 유품, 연대 · 주제별로 본 만해 한용운의 일대기가 보기 좋게 전시되어 있었다.
만해마을은 만해의 기상과 자취를 더듬어 볼 수 있는 곳뿐만 아니라 다양한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었다. 문인들이 창작활동에 집중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함으로써 한국문학의 발전에 기여하고 있고, 한국문단을 대표하는 문인을 초청하여 월 1회 심도 있는 문학 강좌를 개설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 곳에서 가족과 함께 주말을 이용하여 사찰 체험도 할 수 있으며, 문화의 소외지역에 사는 주민들에게 수준 높은 문화를 향유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주는 '만해마을 문예대학'을 운영하기도 한다. 마지막으로 청소년들이 아름다운 자연 환경 속에서 민족의 정신적 지도자인 만해 한용운 선생의 생명사상, 민족사상, 진보사상을 배우고 실천할 수 있는 학습의 장으로도 이용되고 있다. 만해의 이름 하나로 이렇게 좋은 일들이 꾸려지고 있으니, 그의 업적은 사후에도 계속되고 있다 할 수 있겠다.
7.
만해마을을 둘러본 뒤, 우리는 버스를 타고 ‘인제 산촌 민속박물관’에 들렀다. 그 곳에서 인제 산골 마을의 풍습과 세시풍속을 엿보고, 옛 어른들의 지혜와 슬기를 음미하며 서울로 향했다.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숨가쁜 일정을 소화한 피곤한 몸을 창가에 의지한 채 하염없이 꿈속에 빠졌다. 그래서인지 강원도 설악 한가운데서 만났던 만해의 현적(顯跡)이 꿈이었는지, 생이었는지 몽롱하기만 하다.
다만 한 가지 아련하게 남는 것이 있었으나, 그것은 이상하게도 그의 영광이나 업적이 아닌 그의 상처였다. 상처의 조건에는 두 가지가 있다. 그것은 강한 것과 약한 것이다. 강한 것이 약한 것에 어떤 충격을 가했을 때, 약한 것에 그만 상처가 남아버리고 만다.
만해에게 강함으로 다가왔던 것, 나아가 두려움과 고독함으로 다가왔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많은 사람들이 말하는 나라 잃은 설움과 고통이었을까. 물론 그러한 것을 부인할 수는 없겠지만, 나는 그의 작품 저편에 숨어있는 상처란 것이 비단 그런 문제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 만해 문학기행을 통해 그의 삶을 더듬어 보면서 느낀 것은 다양한 이름으로 화려하게 포장된 만해가 아닌 한 개인으로서 생을 감당한 아니, 감당할 수밖에 없었던 만해였다. 위대한 모든 작가들의 삶과 작품이 그러하듯, 만해의 삶과 작품에서도 역시 시대와 이념을 뛰어넘은 생에 대한 의지를 확인할 수 있었으며 그로인한 필연적 고독과 아픔을 엿 볼 수 있었다면 지나친 감상일까.
공지영의 <착한여자>라는 소설에 이런 구절이 있다.
웃음은 위로 증발하는 성질을 가졌지만 슬픔은 밑으로 가라앉아 앙금으로 남는다. 그래서 기쁨보다 슬픔은 오래 오래 간직되는 성질을 가졌는데 사람들은 그것을 상처라고 부른다.
그래서일까. 한 세기를 앞서 살아간 만해의 상처가 은근히 느껴졌던 것이.
그러나 상처 너머 존재한 의지와 희망,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源泉)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부었습니다.’혹은‘당신은 물만 건너면 나를 돌아보지도 않고 가십니다 그려. 그러나 당신이 언제든지 오실 줄만은 알아요.
라는 누군가의 목소리가 내게 그만 웃어도 된다 허락해 주는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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