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향의 계층대한 사모 혹은 반발

 

‘자기가 태어나고 자란 고장’, ‘조상 때부터 대대로 살아온 곳’이라는 정의에서 나아가, ‘고향’은 이를 떠난 이들에 의해 ‘상상된 공간’, ‘심상적인 공간’, ‘낙원으로서 이상화된 공간’으로 이해되어왔다. 그러나 이처럼 고향을 낙원과 같은 곳으로 바라보는 정도가 사람마다 모두 동일한 지에 대해 의문을 품은 일본의 한 시인인 이시카와 다쿠보쿠에 의해 ‘고향의 분열’이라는 개념이 뒤이어 등장하였다.

  다쿠보쿠에 의하면 고향은 그리운 고향’과 ‘나를 떠밀었던 고향으로 분리된다. 전자는 고향에 대한 사모를, 후자는 고향에 대한 반발을 낳는다. 특히 다쿠보쿠는 ‘나를 떠밀었던 곳’으로서의 고향을 더 깊게 각인하고 있는 이들에 주목한다. 이들은 ‘고향에 의해 박해당한 우리에게 고향이라는 관계성은 회복될 수 있는가’에 대해 고민한다. 보통 도시로 간 사람들은 ‘고향’이라는 추상화된 공간을 하나의 근거지로 삼고 이를 기반으로 현재의 공간을 상대화하며 정체성을 바로잡아나간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고향에 대한 반발을 품은 채 도시로 떠나온 사람들은 도시 안에서의 자신의 정체성을 세워나가는 데에 필요한 바탕이 흔들리게 된다. 

  고향에 대한 이와 같은 인식은 이와모토 요시아키에 와서 ‘이향의 계층성’으로 이어진다. 이는 쉽게 말해 고향에 대한 인식이 사람마다 단일하지 않다는, 즉 객관적이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마다 앞서 말한 ‘고향의 분열’의 정도, 즉 고향에 대한 사모 혹은 반발의 정도에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이향의 계층성’에 관한 논의는 최근 조선족의 이민 문제로까지 이어진다. 약 200만 명으로 추산되는 중국 조선족은 한반도에 살다가 19세기 중반에서 1945년까지 두만강, 압록강을 건너와 동북에 정착한 민족의 후예로서 오늘도 여전히 유대민족과 마찬가지로 디아스포라의 특성을 갖고 있다. 특히 1978년 개혁개방 이후 조선족의 한국·일본·러시아·미국 등 나라로의 이동 및 산해관 이남 대도시로의 이주는 새로운 디아스포라들을 양산하고 있다.

  이들 조선족들에게 있어 고향은 ‘자기가 태어나고 자란 고장’일 수는 있어도 ‘조상 때부터 대대로 살아온 곳’이라고는 할 수 없다. 또한 조선족들은 한편으로는 이주민(移住民)이라는 굴레와, 이로 인해 더욱 증폭된 가난으로 인해 애초에 ‘고향’이라는 공간이 원초적으로 부여하는 따스함을 정주민(定住民)에 비해 덜 받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즉 애초에 이주민이었던 이들이 1978년 이후 다시 이주의 과정을 거치면서 조선족의 고향 인식은 더욱 복잡해졌다. 

본 서평에서는 이 중에서도 ‘한국으로 떠나온 조선족들’에 주목해보고자 한다. 1970, 1980년대에 우리나라 사람들이 아메리칸 드림이라는 명목 하에 미국으로 떠난 것처럼, 조선족들도 자의 반 타의 반 돈을 벌기 위해 한국으로 떠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요시아키가 말한 ‘이향의 계층성’은 바로 이들에게도 적용된다. 연변을 떠나 한국으로 들어온 조선족 사이에서도 ‘그리운 곳’으로 고향을 인식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나를 떠밀었던 곳’으로 고향을 인식하는 사람이 있는 것이다.

2012년에 출간된 김사과의 <테러의 시>에는 이 중 후자의 모습이 보다 극단적으로 서술되어 있다. 소설 속 주인공의 인식은 ‘고향에 대한 반발’을 넘어 ‘고향에 대한 부정’으로까지 이어진다.

<테러의 시>의 주인공 제니는 사막화된 연변(으로 추정되는 곳)의 한 마을에서 서울 외곽의 불법 섹스 클럽으로 팔린 인물이다. 고향 마을에서 제니는 아버지에게 심한 폭력은 물론 매일 강간까지 당하는 나날을 보낸다. 그러던 중 제니의 아버지는 그녀를 서울의 섹스클럽에 팔아넘기고 돈을 챙긴다. 그리고 그녀가 차에 실어지자마자 그간 모래의 무게를 견디지 못 하던 집이 무너지고 그녀의 아버지는 이에 깔려죽는다. 제니가 차 안에서 이 장면을 바라보며 웃는 것으로 소설은 시작한다.

제니의 상상 속에서 도시는 언제나 모래에 파묻혀 있다.

문이 열리고 들어오는 남자는 대개 중국인이거나 조선족이다. 남자는 제니에게 조선족이냐고 묻는다. 난 그런 거 몰라요. 제니가 웃는다. 남자는 제니에게 중국말을 할 줄 아느냐고 묻는다. 난 그런 거 몰라요. 제니가 웃는다. (…중략…) 나는 중국에서 왔다. 너도 중국에서 왔니? 제니는 한 손에 남자의 페니스를 잡고 웃는다. 난 그런 거 몰라요.

    제니는 언제나 고향을 ‘모래 속에 파묻혀 있는 곳’으로서만 인식할 뿐 ‘그리운 곳’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중국인이거나 조선족인 섹스클럽의 손님이 동향(同鄕)이라는 데에서 그녀와 동류의식을 느끼려 할 때에도 제니는 “난 그런 거 몰라요.”라고 일관할 뿐이다. 제니에게 “너도 중국에서 왔니?”라는 말을 건네는 행위에는 고향이 같다는 것을 빌미로 연대하고자 하는, 위로받고자 하는 의식이 깃들어 있다. 따라서 이들은 섹스클럽을 찾을 때에도 (넓은 범위로) 자신과 같은 고향에서 온 여자를 골라 관계를 가지며 고향이 같은지를 계속해서 되묻는다.

  이처럼 같은 고향을 떠나 한국으로 왔을지라도 고향에 대해 어떻게 인식하는지는 개인마다 그 층차가 있다고 볼 수 있다. 인용문 속 남자에게 고향이란 도시에서도 안정감을 느낄 수 있게 해주는 보다 이상적인 공간인 것에 비해, 제니에게 고향은 그저 모래에 묻힌, 자신이 떠나온 곳으로만 인식되고 있을 뿐이다.

  이후 제니는 그녀를 가정부이자 섹스파트너로 고용한 한 남자에 의해 서울의 한 부잣집에서 살게 된다. 

그리고 모든 것은 갑자기 얼마나 쉽게 좋아지게 되었는가. (…중략…) 제니는 곧 일곱 가지 종류의 샐러드드레싱 만드는 법과 각종 오믈렛, 시칠리아식 해물 파스타, 인도식 정통 카레, 각종 일식 덮밥 만드는 법을 익힌다. 그리고 튼튼한 스타킹과 양말을 싸게 파는 상점의 위치, 하루 중 빨래가 가장 잘 마르는 시간대, 질 좋은 한우를 파는 정육점, 진짜 국산 쌀을 사용해 떡을 만드는 떡집, 화학 조미료를 사용하지 않는 분식집, 유기농 야채를 저렴하게 살 수 있는 인터넷 사이트, 정통 재래식 된장을 살 수 있는 반찬집의 정보 등을 훤히 꿰뚫게 된다. (…중략…) 모든 것이 완벽하다

 

 제니는 이와 같이 점차 서울 중산층의 생활 감각을 체득해 나간다. 그리고 제니는 “모든 것이 완벽하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도 잠시, 제니는 다음과 같이 발화한다.   

창밖으로 펼쳐진 하늘은 안 좋은 색을 띤다. 바닥에 깔린 회색 카펫에서는 안 좋은 냄새가 난다. 침대 곁의 등은 안 좋은 빛을 낸다. 냉장고에 든 물은 안 좋은 맛이 난다. 욕실에 있는 샴푸에서는 안 좋은 향이 난다. / 모든 게 안 좋다.

 

그리고 제니는 서울의 고급 아파트를 떠나 자신이 원래 살던 곳과 비슷한, 마약에 취한 이들이 모여 사는 한 낡은 아파트로 도피한다.
  앞서 설명한 바처럼 도시 공간에서의 정체성 형성에 크게 관여하는 존재로서의 고향이 무너진 이들은 그렇지 않은 이들에 비해 도시 안에서 자기 정체성을 확립하고 또 이에 적응해나가는 데에 어려움을 겪는다. 여기서 또한 ‘이향의 계층성’을 살펴볼 수 있다. 이는 소설 속 다른 조선족 여인과 제니의 비교를 통해 더욱 선명하게 드러낼 수 있다. 

조선족 여자는 조선족이라는 것을 제외하면 제니와 모든 것이 다르다. 그녀의 한국 체류는 합법이다. 중국엔 그녀를 기다리는 가족이 있다. 그녀는 가정부로 일하며 번 돈 모두를 가족들에게 보낸다. 그리고 그녀에게는 나라가 있다. 그녀가 항상 소지하고 있는 붉은색 여권이 그것을 증명한다. 그녀는 중국을 사랑하고, 중국 또한 그녀를 사랑한다. 그녀의 나라, 전 세계 인구의 반을 먹여 살리는 중국은 현존하는 가장 위대한 공산주의 국가다.

 

인용문 속 조선족 여자에게 있어 고향이란 가족이 있고, 자신이 힘들게 번 돈을 모두 보내면서까지 지키고 싶은 ‘그리운 곳’이다. 이러한 의식은 그녀로 하여금 열심히 살아야 하는 이유 등을 제공하며 한국에서의 정체성을 흔들리지 않게 하는 정신적 지지대가 된다. 그러나 제니는 어떠한가. 제니에게 고향은 모래’, 즉 언제라도 흩어져버릴 수 있는 불안정한 존재일 뿐이다. 이는 제니가 다음과 같이 절규하도록 만든다.  

난 아무것도 아니니까! / 한국 사람이 아니니까! / 중국 사람도 아니지! / 엄마도 없어! 아빠도 없어! / 가족이 없다고! / 돌아갈 데가 없다고! / 그러니까 난 아무것도 아니라고! / 아무것도 아닌 게 뭔지 알아? / 모르겠지! 알 수가 없겠지! / 평생 죽었다 깨어나도 알 수가 없겠지! / 하지만 괜찮아! 왠지 알아? 왠지 알아? / 왜냐하면, 어, 왜냐하면……. // 모래바람이불어오고있다멀리서어멀리서아직은아주멀다하지만곧 다가와아주 가까워져어여기로 온다 우리모두를 우리의머리위로 쏟아져 내린다아무도벗어날수없어 끝없이몰려온다그게모두를죽일거다죽는다죽는다아무도 살아남지못한다끝이다끝끝끝끝 끝끝끝끝어세계가끝이 납니다 조심하시오피할수없다멸 망멸망멸망파괴 파괴 파괴피하는방법은 없다아무것도없다그러니 조심하시오 무진장 조심하시오 방법은없다피하시오깊은 곳으로 피하시오더깊은 곳으로 가시오 피하시오 더 깊은곳으로깊은곳으로 깊이아주 깊이아주깊이더더더더 더

 

똑같이 연변에서 한국으로 건너온 조선족 여자일지라도 이처럼 고향을 ‘그리운 곳’으로 인식하기도, ‘나를 떠밀었던 곳’, 나아가 ‘나를 멸망·파괴하는 곳’으로 인식하는 등 차이를 보인다. 즉 <테러의 시> 속 이와 같은 제니의 절규는 ‘공동체의 이상적 유토피아’로 상정되어 오던 고향이 부정되고, 물리적 고향을 떠나온 이들을 더 이상 ‘공동체’라는 이름 아래 하나로 바라볼 수는 없게 되었음을, 즉 이들 사이에서도 고향에 대한 인식에 있어 계층성이 형성되어 있음을 잘 보여준다고 하겠다.

 

글 / 국어국문학과 4학년 이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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