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올해는 오스트리아를 대표하는 화가인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가 서거한지 10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두 연인이 서로에게 의지한 채 키스를 하고 있는 그의 대표작품 키스(1907)는 많은 사람들에게 영원한 사랑의 이미지로 남아 가장 많이 복제된 작품 중 하나입니다.

 

 

"2018년, 오스트리아 대표화가 키스의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 서거 100주년"

 

 

 구스타프 클림트는 수수께끼 같은 화가입니다. 그는 생전에 자신의 그림에 대해 한 번도 설명한 적이 없고, 인터뷰도 하지 않았으며 사생활은 철저히 숨겼습니다. 자화상도 그리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가 남긴 짧은 글이 하나 있습니다. “나에 관해 알고자 하는 사람은- 물론 화가로서의 나를 말한다. 중요한 것은 바로 그것뿐이므로- 내 작품을 보고 찾아내면 될 것이다. 내가 어떤 사람이며,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이러한 언행으로 인해 그와 그의 작품이 더욱 신비롭고 매력적으로 다가오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클림트는 죽은 지 50년 후부터 재평가되기 시작하더니 언제부턴가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화가로 손꼽히게 되었습니다.

 

 평생토록 찬반논의가 무성했던 미술가 클림트는 대중과 주류 미술계 그리고 평론가들로부터 사랑과 미움을 동시에 받았습니다. 그는 종종 신랄한 비평의 표적이 되기도 했으며, 때로는 젊은이들의 예민한 감수성을 해친다는 이유로 작품 앞에 스크린을 친 채 전시되기도 했습니다. 1900년에는 포르노 미술과 지나친 성도착이라는 죄명으로 외설시비에 휘말리기도 했습니다. 성욕을 삶의 결정적인 요소로 중요시했던 클림트의 견해와 화풍은 당시로서는 매우 충격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는 표현주의와 초현실주의가 지속적으로 천착했던 근대 에로티시즘(eroticism)의 서막을 열어주었습니다. 

 

 

"클림트의 신비롭고 매력적인 작품, 사후 50년 재평가로 세계 최고 화가로 거듭나"

 

 

 클림트는 1862년 오스트리아 빈 근교의 바움가르텐에서 태어났습니다. 보헤미아에서 이민 온 그의 아버지는 금세공사이며 판화가였지만, 그리 성공하지는 못해 클림트의 어린 시절은 가난하고 우울했습니다. 14세 때인 1876년 빈 응용미술학교에서 회화와 수공예적인 장식 교육을 받았으며, 1883년 졸업 후에는 그의 동생 에른스트와 동료 학생인 프란츠 마치와 함께 공방을 차려 공공건물에 벽화를 그리는 일을 했습니다. 그러던 중 1880년대 말경 빈에 새로 들어선 국립극장과 미술사 박물관에 장식화를 그려 건축 장식미술의 대가로 자리를 굳혔습니다.

 

 그러나 1892년 아버지와 동생 에른스트의 죽음으로 정신적인 동요를 겪게 되면서, 인상파와 상징주의 등 다양한 아방가르드(avant garde) 운동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클림트는 순수와 응용이라는 이분법을 넘어 총체적인 예술을 지향했습니다. 클림트의 작품은 관능적인 여성 이미지와 찬란한 황금빛, 화려한 색채를 특징으로 합니다. 그는 성(性)과 사랑, 죽음에 대한 풍성하고도 수수께끼 같은 이미지들을 연결시킨 작품들을 선보여 많은 사람들을 매혹시켰습니다.

 

 

"도서관 소장중인 '구스타프 클림트' 관련 도서와 함께 빛나는 3월 느껴보세요"

 

 

 도서관에서는 이 달의 테마도서로 구스타프 클림트와 명화산책이라는 주제로 그의 삶과 작품, 세계관을 엿볼 수 있는 도서들을 선정했습니다. 소개해드린 책들은 모두 우리도서관에 소장중인 도서들입니다. 새학기를 시작하는 3월에는 클림트의 빛나는 작품들과 함께 세계 명화들을 감상하며 재미와 감동을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한송이 계장(중앙도서관 학술정보관리팀) Tel. 2260-3450, E-Mail : syhan@dongguk.ed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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